하드SF 문예부흥으로의 초대
과학적 논리의 정합성을 중시하는 하드SF의 두 번째-혹은 세 번째 부흥기로 이야기되는 근래 영미 SF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편집. 시공사의 21세기SF도서관이나 황금가지의 오늘의SF걸작선 등을 통해 짚어보자면 이 계열의 SF들은 사실 고전 하드SF에서처럼 과학적 논리/지식의 정합성보다는 최신 과학 이론에서 비롯된 비전을 스페이스오페라의 상상력과 결합시키는 쪽이 아닌가 싶지만, 뭐, 요즘의 잡종 메탈들도 하드록/헤비메탈의 후예라면, 그런 의미에서 하드SF 계열로 봐줄 수도 있지 않겠나 싶다.
개별 수록작 단평은 아래에 :
리얼리티체크(데이비드 브린)
간결한 엽편. 다른 단편집들에서 선보인 네이처 게재 단편들 중에선 좀 떨어지는 편이다. 데이비드 브린이면 꽤나 기대치 높이는 이름이지만.
올림포스산(벤 보바)
일본인 주인공에 대한 주변 설정은 좀 구식 오리엔탈리즘스러워서 하드SF들의 영미권 SF 특유의 정치적 편협함을 새삼 상기시켜주지만, SF의 깊은 뿌리들 중 하나로서 외계에서의 모험담이라는 부분을 나름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어느성화학자의생애(브라이언 스테이블포드)
재미있는 작품. 자칫 썰렁하기 쉬운 소재를 60년대 러브 앤 피스를 떠올리게 하는 결말이 아주 깔끔하고 상쾌하고 심지어 약간 뭉클하기까지 한 감동으로 연결시킨다. 생화학/유전공학적인 묘사만으로 하드SF 단편집에 올라온 건 좀 의아하지만, 좋은 단편.
틈새(피터 와츠)
하드하다기보단 하드보일드한 SF. 어쩔 수 없이 어비스 나 스피어 가 떠오르지만, 두 작품에선 등장하지 않는 기기묘묘한 심해어들의 묘사도 괜찮았을 뿐 아니라, 극한 환경에의 적응을 위한 인체 개조는 SF팬들의 유구한 로망 중 하나로, 건조한 문체와 잘 어우러졌다.
기러기여름(스티븐 백스터)
별로 참신하지는 않지만, 다만 외계 생명종의 보호와 인간 개인의 생명 사이의 딜레마라는 SF의 오래된 모티프를 꽤 날카롭게 다룬 단편.
헤일로(칼 슈뢰더)
미 서부 개척 시대를 연상시키는 외우주 개척 식민지에서의 하드하면서도 스페이스오페라적인 에피소드. 한 세계의 파국적 위기와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교감들-SF 특유의, 거시와 미시 사이의 교차 속 감동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착한 쥐(앨런 스틸)
나쁘진 않지만, 별로 하드하지 않았고, 주제도 애매한 단편. 풍자인지 로맨스인지 드라마인지, 성장하지 못한 사춘기 소년처럼 작품 자체가 정체성의 혼란에 휩싸였다.
시간의 모래성(마이클 플린)
동네 선술집이란 배경은 양자역학적 사변을 풀어놓기에 좀 튀어보이지만, 사변 자체는 그럭저럭 괜찮다. 스티븐 킹의 신들의워드프로세서 도 잠시 연상시키는 소품.
불사조 품기(프레데릭 폴)
기본 아이디어는 괜찮지만 서사랑 제대로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데다 소도구들이 너무 전형적이고 분량이 불필요하게 길어져서 늘어진 느낌의 단편.
매로우(로버트 리드)
분량 있는 단편집의 마무리를 훌륭하게 해낸 멋진 단편. 댄 시몬즈의 일리움 을 떠올리게 하는 스케일이 꽤나 과격한 상상력의 설정에 고전적인 해양 소설에서 빌려온 듯한 플롯을 얹으니까 재미의 밀도가 상당하다. 앞에서 언급한 스페이스오페라의 상상력을 탄탄한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허황하지 않게-심지어 하드한 느낌으로 잘 형상화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