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단편선집을 통해서, 지구 종말 삼부작을 넘어 비로소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 세계 전반을 개관할 수 있었는데, 미래에 사막화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장편소설은, 그러한 개관을 바탕으로 해야 좀더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듯하다. 밸러드의 묵시록적 미래관을 떠받치는 두 개의 중심축은 각각 히로시마 이후 계속된 핵무기 실험과 나사의 유인 우주 탐사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한데, 전자야 SF들의 장미빛 미래 전망을 부순 결정적 사건으로 많이 이야기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밸러드가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듯한데, 화성 탐사 이후 화성인이 대운하를 건설한 행성로맨스가 불가능해진 것처럼, 우주 탐사와 개발이 현실화되면서 우주 전체가 이전 SF들에서처럼 꿈과 환상과 낭만의 무대가 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SF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초래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두 사건의 함의에 아랑곳하지 않고(혹은 애써 외면하고) 전통적인 SF를 쓴/쓰고 있는 작가들도 많지만, 밸러드의 어딘가 정신이 나가버린 강박적인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내면이 외화된 듯한 황량한 풍경들은 그러한 함의를 솔직하게 직시한 결과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구 종말 삼부작은 SF 종말 3부작으로 치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석화된 상상, 리얼리티에 익사한 SF, 불타버린 꿈...) 그리고 미국의 우주 탐사와 아메리칸 드림 사이의 긴밀하고 복잡한 관계를 생각해보면, 기후 변화로 서해안을 제외한 대륙 전체가 사막화된 미국을, 몽상과 환상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유럽의 2차 탐사대가 가로지른다는 이 작품은 어쩌면 J.G. 밸러드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상륙 이후, 지나가버린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에 사로잡힌 탐사대가 점차 와해되고, 주요 인물들이 조난과 난파에 가깝게 사막의 갈증 속에 피폐하게 드러누울 때까지의 전반부는 곧바로 지구 종말 삼부작을 떠올리게 하는, 지극히 밸러드적인 진행을 보이는데,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이후 벌어지는 새로운 사건들은, 우선 밸러드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전통적인 SF 소재들ㅡ자동인형, 태양광비행기 등등ㅡ이 풍성하게 쏟아진다는 점이 우선 이채롭고, 아메리칸 드림 이면에 억압되어 있던 광기ㅡ편집증과 고립주의, 파괴욕과 지배욕ㅡ를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도 흥미롭다. 전반부는 바깥에서 바라본 아메리칸 드림이라면 후반부는 안에서 들여다본 아메리칸 드림이랄까. 대부분의 작품들과 달리 다소 낭만적으로 처리된 결말은 미국을 좋아해서 썼다는 밸러드의 언급이 진심이었나 싶어 쓴웃음을 짓게 하는데, 전반적으로 밸러드 작품 세계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포만감 가득하게 읽을 수 있는 장편이라고 생각된다.
본격 스팀펑크 냉혹극
유럽풍의 과장된 미래상과 아기자기한 스팀펑크 소품들로 인해 읽다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절로 떠오르지만, 이 시리즈는 하야오라면 절대 택하지 않았을 냉혹한 결말을 향해 성큼성큼 잘도 걸어간다. 주된 갈등은 결말에서 풀리긴 하지만 완전히 풀리진 않고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이미 뿌려지며, 풀리는 과정도 동화처럼 쉽고 간단하지는 않다. 이 괴팍한 재미, 지루하지 않고 신나며, 심지어 신선하기까지한 즐거움은 아마도 영국제라는 출처에서 기인한 걸까? 1편만큼 혁신적이진 않지만 1편의 성과, 세계관을 잘 이어받아 넓힌 수작. 3부나 4부도 기대해볼 만 하다.
어른들을 위한 스팀펑크 동화
보다 간단하게는 청소년용 스팀펑크라고 하는 게 낫겠다. 보다 정확하게 첨언하자면, 팀 파워스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패니메이션적인 의미에서의 통속적인 스팀펑크. 신자유주의의 알레고리스러운 도시진화론이라는 배경 아래 다소 평면적인 등장인물들이 활극을 펼치는데, 스토리 전개는 의외로 냉혹해서 주요 인물들이 제때 제때 가차없이 죽어나가고, 주류 이데올로기의 모순에 대한 소시민의 각성이 하드하게 그려진다. 현대 사회의 캐리커쳐라고나 할까.
최후의 날 그후의 황폐함과 희망에 대한 SF 상상력의 향연 50년대를 기점으로 서구 SF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이후 과학 기술에 대해 더이상 낙천적일 수 없게 되었을 뿐아니라 인류의 미래 자체에 대해서 결코 낙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포스트 아포칼립스-이 단편집에서는 메가워 이후라는 단어를 추천하고 있지만-라는 서브 장르가 현대 SF에서 얼마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 50년대 이후 그야말로 쏟아져나온 포스트 아포칼립스물들 중 수작들만 선별한 이 작품집의 재미와 감동은 각별하다.
[#M_ more.. | less.. |01. 세상을 파는 가게(The Store of the Worlds) - 로버트 셰클리 ★★★ 예전에 읽은 작품이지만, 다시 읽어도 좋았다. 멸망 이전의 세계에 대한 노스텔지어 속에는 어쩔 수 없이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02. 거대한 섬광(The Big Flash) - 노먼 스핀래드 ★★ 사이키델릭록의 묘사는 좋았고,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편집증적 악몽과의 결합도 절묘했지만, 그래도 록밴드에서 세계 멸망으로 이어지는 건 너무 비약적이지 않나? -.-
03. 현대판 롯(Lot) - 워드 무어 ★★★★ 멋졌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에 이입되어서, 조마조마하면서 읽어나갔는데, 그래서, 답답한 마누라와 멍청한 애새끼들 때문에 결국 실패하는 결말로 끝날 거라 미리 짐작하고, 그러게, 처음부터 그런 여자를 고르는 게 아니었지, 그게 다 업보야, 끊임없이 되뇌면서 읽어나가다가 결말에서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무릎 쳤다. 오오, 원제가 그런 뜻으로 쓰인 거였고만. 아아, 통쾌해라. :D 물론, 냉정하고,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생각해보자면, 비극적인 결말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은-혹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아남는 주인공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핵전쟁을 불러오는 남성성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거라고 볼 수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그러기엔 작가가 아내와 자식들을 너무나 생생하고 짜증나게 잘 그려내서.. ;-)
04. 바퀴(The Wheel) - 존 윈덤 ★★★ 정갈한 소품. 핵전쟁 이후, 기술에 대한 거의 중세적 죄악시는 너무 진부하지만, 그래도 플롯 자체가 너무 호소력 있다. ㅠ.ㅠ)b
05. 터미널 해변(The Terminal Beach) - J. G. 밸러드 ★★★ 발라드 특유의, 이미지의 향연.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스틸 사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실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이해하는 것보다는 느끼는 게 효과적일 작품.
06. 내일의 아이들(Tomorrow's Children) - 폴 앤더슨 ★ 개인적으로 폴 앤더슨을 싫어하는 이유들이 집약되어서 나타난 작품. 거시적인 문제를 미시적으로 풀어낸 건 좋지만, 등장 인물들은 결국 히스테리컬한 종이 인형들에 불과하다. -_-
07. 누가 상속자인가(Heirs Apparent) - 로버트 애버나시 ★★★ 농경 대 유목으로의 회귀는 꽤 설득력 있는 전망인데, 너무 미국적 관점에서 본 냉전의 반영이라 좀 심기가 불편했다. 뭐, 당시-인민의 태양 스탈린 동무께서 영도하셨던 소련이 실제로 그렇긴 했겠지만. ~_~ (그래도 그 맞은편에, 그래서 멋져보이게 미국 영웅을 세워놓은 건 아무래도 좀 그렇단 말이지. _-_ )
08. 바빌론의 물가에서(By the Waters of Babylon) - 스티븐 베네 ★★★ 그 당시부터 장르 바깥에서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게 너무 부럽다. ㅠ.ㅠ
09. 부드러운 비가 올 거야(There Will Come Soft Rains) - 레이 브래드버리 ★★★★ 사실, 화성연대기 의 그 길고 아련한 스토리 속에서 봤을 때만큼 그렇게 감명 깊진 않았지만, 별도로 떼어놓고 봐도 결코 처지지 않는구나.
10. 시카고 어비스 역으로(To the Chicago Abyss) - 레이 브래드버리 ★★★ 전형적인 레이 브래드버리 단편. 너무나 브래드버리적인.
11. 루시퍼(Lucifer) - 로저 젤라즈니 ★★ 사실 젤라즈니 단편들 중에선 좀 단조롭고 처지는 편이지 않나? -.-
12. 동쪽으로 출발!(Eastward Ho!) - 윌리엄 텐 ★★ 인디언과 흑인들에 대한 죄의식과 그에서 비롯된 도착적 피해 의식이 종말 이후라는 배경을 빌미로 노골적으로 발현된 작품. 뭐, 보기에 따라선 단순한 전복적 상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불쾌할 따름이었다.
13. 성聖 재니스의 향연(The Feast of Saint Janis) - 마이클 스완윅 ★★★
14. "그대를 어찌 잊으리, 오 지구여..."("If I Forget Thee, Oh Earth...") - 아서 클라크 ★★★★ 역시나 아서 클라크. ;ㅁ;
15. 소년과 개(A Boy and His Dog) - 할란 엘리슨 ★★★★ 명불허전. ㅠ.ㅠ)b 결말에서 주인공의 선택은 현대판롯 과도 겹쳐지는데, 그보다는 아기자기한 그야말로 SF적 소품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ㅁ;
나노공학이 불러온 인류 대멸종. 사실 멸종은 아니겠으나, 인류라는 종으로서의 존속은 단절되었으니까 대충 대멸종. 개개인의 집합으로서의 인류가 집단군체로 수렴되는 것은, 저 유명하고도 유명한 유년기의끝 외에도 많은 작품에서 형상화된 아이디어지만, 이 소설은 여타의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시각과 분위기 속에서 인류의 마지막 날을 그리고 있다.
침묵의 봄이 지구 전체에 도래할 때까지 각국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동물과 식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임과 유산이 확산되고 문명은 마침내 파국을 맞지만, 이를 예견한 미국의 한 가문은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소규모 자급자족 체제를 구성하고 불임에 맞설 의학 연구소까지 건립한다. 그리고 그들은 3세대 안에서는 불임의 극복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인간 복제로 인류를 유지해나가기로 결정한다.
굳이 끌어들이자면 어쩔 수 없이 어슐러 르귄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르귄이 보다 거시적이고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을 추구했다면 윌헬름은 보다 미시적이고 보다 감각적인 느낌이다. 인류의 멸종과 회복이라는 그야말로 거시적인 주제마저도 이 소설에서는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로 담겨진 것이다.
물론 속되고 흔한 3류 연애담이 아니라, 케이트 윌헬름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통해 아홉생명 의 생존자 클론이 밤인사를 하듯이 그렇게, 비인간적 실존을 넘어서는 인간성의 힘을 나지막하지만 힘있게 말하고 있다.
바람의열두방향 혹은 밤을사냥하는자들 과 같은 아담한 판본으로 위의 표지만 봤을 때 받았던 부정적인 이미지는 상당히 감쇄되었다. 특히나 뒷표지의 주홍+연두의 상큼한 색 배합은 매력적. (그동안 젤라즈니는 왜 그리 검은 바탕으로만 나왔을까?)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SF작가, 로저 젤라즈니의 첫 장편 이라는 뒷표지 문구도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번역은 약간 갸우뚱. 재번역이 부딪히게 되는, 구번역과의 차별화와 원문 충실 사이의 딜레마에서 역시나 이 책도 비틀거린 느낌이다.
2차대전의 외삽일까? 수많은 세월 동안 전란을 치른 유럽에 아메리카의 최신식 전함이 나타난다. 태어난 이후로 줄곧 전쟁 속에서 살아온 주인공은 장렬한 희생을 통해 미국의 유럽을 향한 손길을 저지한다. 전란 속에 지친 유럽 병사들의 무기와 전술은 2차 대전에서 달라진 것이 전혀 없고, SF적인 부분이라면 유일하게, 후반부에 나타난 미국의 최신 군함의 묘사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