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별점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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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창의 두 번째 중단편집
2002년에 출간된 당신인생의이야기 이후 17년 만에 출간된 두 번째 중단편집이다. 첫 중단편집의 충격은 기대하기 힘들지만(충격은 대개 처음에만 오는 법이고, 소프트웨어객체의생애주기 외에도 이런 저런 공식/비공식적인 경로로 국내에 이미 소개된 작품들이 상당수 포함된 탓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견실한 SF들이 수록되어 있다.
1.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
플롯이 매우 정교하고 마지막의 파토스가 효과적이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으로는 진부한 결정론적 시간여행물의 재탕이라는 점이 아쉬운 작품이다. 약간 비약이지만 테드 창의 근작들은 자칫하면 진부한 도덕극으로 굴러떨어질 아슬아슬함이 엿보인다.
2. 숨 ★★★★★
일단 세계-우주 자체가 너무 압도적이고, 그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압도적이며, 그 현상에 따라 주인공이 일으키는 사건이 너무 압도적이고, 사건의 결과 다다르는 결말의 결론이 너무 압도적인 문장으로 써져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다만 압도될 수밖에. 메시지는 단순한 도덕 설교의 재탕에서 벗어나 실존적이고, SF만의 방식으로만 도출되었기에 완벽하고 아름답다. 되돌아 보면 앞의 단편선에서는 일흔두글자 정도만이 떠오른다.
3. 우리가 해야 할 일 ★★★
주제와 형식과 표현과 결말의 합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짧은 만큼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
4.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5.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
모든 것이 기괴했던 서구 근대의 기괴했던 육아에 대한 글. 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글. 의도와 결과 사이의 아이러니ㅡ실험 관찰이 세계에 대해서 보다 그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줄 뿐이라는ㅡ에 관한 글.
6.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
언어와 의식과 기억과 문화에 대한 아름다운 작품. 네인생의이야기 로 대표되는, 세계에 대한 사변을 개인의 드라마로 끌어오는 테드 창 특유의 작법이 잘 살아 있다. 객관적 진실과 주관적 기억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비극을 근미래 아버지와 딸 사이의 갈등 속에서는 객관적 진실의 편을 들고, 중간 중간 삽입된,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로 전이된 아프리카 소년의 체험에서는 오히려 주관적 기억의 편을 들어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숙고해보도록 이끈다. 새로운 테크놀러지가 개인과 공동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탐구로서 SF에 대한 작가의 지론이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7. 거대한 침묵 ★★☆
테드 창의 작품들 중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으로 파토스에 경도된 엽편. 그렇지만 고독과 단절의 심연을 건너려는 절절한 독백은 마음을 울린다.
8. 옴팔로스 ★★★★
표면적으로는 0으로나누면 과 비슷한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의 신념과 지식에서 벗어난 현상을 발견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믿었던 질서와 원리가 모두 무너지고 의도 없고 목적 없는 냉혹한 우주에 던져진 인간은 무엇을 통해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다시 자유의지의 문제로 발전한다. 테드 창의 제2기라고 해야할 이번 20년 동안 집요하게 천착한 주제다. 주제에 맞게 완전히 새로운 원리로 돌아가는 우주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다시 개인의 극적인 체험과 관점의 변화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표제작 숨 과 더불어 이 중단편선에서 테드 창에 대한 기존의 기대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다.
9.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플롯은 정교하고 치밀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파토스에 기댄 드라마일 뿐이라는 점이 아쉽다. 평행우주라는 설정을 빌려 테드 창은 의도와 결과 사이의 차이와 이를 통해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을 또다시 던지는데, 평행우주 혹은 다중우주 속 또다른 나가 맞게 되는 결말을 알게되는 사회에서의 사회적 변화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초점은 개개인이 맞닥뜨리는 작은 일화들에 집중되어 있다.
닐 스티븐슨 지음
성귀수, 송경아 옮김
북레시피, 2018.
★★★☆
SF의 단단한 맛
스노크래시 와 다이아몬드시대 로 닐 스티븐슨을 단순히 사이버펑크 작가로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1권은 내내, 달이 부서진 뒤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올 파국을 대비하는 내용만이, 서사보다는 설명 위주로 진행되어 나가기 때문에 SF 혹은 소설을 읽는 재미가 많이 떨어진다. 하지만 꾹 참고 2권 중간까지 읽어나가면 마침내 달의 파편 세례를 받고 불타오르는 지구의 종말이 근사하고, 생존자들의 우주정거장에서 필요한 물과 질량을 혜성을 끌어온 자원자들의 난파기도 기괴하니 읽을 만하다. 후반의 파국은 너무 급하게 몰아쓴 느낌이지만, 어쨌거나 7명의 여성들로부터 30억 명의 후손이 늘어난 5000년 뒤의 지구에서 시작되는 3권에서는 지금까지의 아쉬움을 모두 떨쳐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SF적인 재미만으로 몰아쳐나간다. 믿어보시라. 3권을 읽기 위해서는 1권과 2권도 충분히 읽을 만하다.
재미 : 4 (3권 기준)
감동 : 4 (3권 기준)
SF : 4 (2,3권 기준)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아작, 2016
★★★☆
화려하지 않은 대신 차분하고 치밀한 스페이스오페라
은하제국과 초광속 전함들이 등장하지만, (중의적인 의미는 잘 살리지 못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사소한 것들ㅡ호감이나 우정, 배려와 양심 같은 것들이 어떻게 거대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앤 레키의 세계는 이언 M. 뱅크스나 댄 시먼스의 우주보다는 르귄의 섬들에 가까운 느낌인데, 초라하거나 실망스럽기보다는 현실적이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스페이스오페라가 진지해질 수 있을까? 이언 M. 뱅크스가 이미 그렇다고 답했지만 앤 레키는 또다른 방식으로, 그렇다고 힘주어 말한다.
재미 : 3
감동 : 4
SF : 3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2010
★★★
본격 스팀펑크 냉혹극
유럽풍의 과장된 미래상과 아기자기한 스팀펑크 소품들로 인해 읽다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절로 떠오르지만, 이 시리즈는 하야오라면 절대 택하지 않았을 냉혹한 결말을 향해 성큼성큼 잘도 걸어간다. 주된 갈등은 결말에서 풀리긴 하지만 완전히 풀리진 않고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이미 뿌려지며, 풀리는 과정도 동화처럼 쉽고 간단하지는 않다. 이 괴팍한 재미, 지루하지 않고 신나며, 심지어 신선하기까지한 즐거움은 아마도 영국제라는 출처에서 기인한 걸까? 1편만큼 혁신적이진 않지만 1편의 성과, 세계관을 잘 이어받아 넓힌 수작. 3부나 4부도 기대해볼 만 하다.
재미 : 3.5
감동 : 3
SF : 3
올라프 스태플든 지음
유윤한 옮김
오멜라스, 2009
★★
따분하고 지루해도 고전은 고전
타임 슬립에 준하여 스페이스 슬립 같은 말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버로우즈의 화성의공주 에서처럼, 주인공은 백일몽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들판에서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 공간으로 순식간에 빠져든다. 그리고 수많은 별들 속의 수많은 생명들이 지성의 완성을 향해 몸부림치는 굴곡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건 마치 아무런 조작 기능이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그저 지켜만 보는 기분이다. 각 별의 문명은 서서히 고조되다가, 지구 유럽의 2차대전을 연상시키는 분열과 대립, 전쟁 속에서 몰락한다. 많은 사건들이 지구 유럽 문명의 단순한 알레고리로 보이고, 뚜렷한 플롯도 없이 처음-중간-끝의 단순한 구성 속에서 너무 넓은 공간 속의 너무 긴 시간 속의 너무 많은 사건들을 그저 줄기차게 풀어내기만 한다.
이쯤 되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어지는데, 그래도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니다. 참을성 있게 읽어나가면, 아서 클라크에서부터 러브크래프트, 줄 베른과 웰즈, 할 클레멘트, 심지어 매트릭스 나 스타워즈 까지 후대 SF들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아이디어들의 원형-혹은 예고편들과 만날 수 있다.
재미 ; 2
감동 ; 1
SF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