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SF들을 성정치적 관점에서만 읽는 것은 분명히 편협한 독서일 것이다. 하지만 2016년 현재 한국 사회는 그런 독법이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필요한 시점으로 보인다. 덧없는존재감 과 비애곡 은 SF만으로서도 훌륭한 작품이지만 우리는 체체파리의비법 과 휴스턴,휴스턴,들리는가 를 읽으며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 모두를 괴롭히고 있는 것인지 직시해야만 한다.
이제 마음 놓고 웃으세요
츠츠이 야스타카의 단편들이 상식적인 독자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면이 없었다고 부인만 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은 사실. 국내에도 몇 번인가 번역된 <心狸學.社怪學>에 수록된 작품들 중 여성 비하적이거나 너무 노골적으로 성적이거나 위악으로 느껴질 정도로 폭력적인 작품들이 특히나 그렇지만, 츠츠이 야스타카가 직접 선별했다는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동안 그러저러한 이유로 야스타카를 멀리했던 독자들도 비교적 부담 없이 야스타카의 훌륭한 SF 유머 감각을 즐길 수 있을 듯 하다. 그래도 꺼림칙한 분들은 '기울어진 세계'와 '이판사판 인질극'을 제외하고 읽으시길.
최후의 날 그후의 황폐함과 희망에 대한 SF 상상력의 향연 50년대를 기점으로 서구 SF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이후 과학 기술에 대해 더이상 낙천적일 수 없게 되었을 뿐아니라 인류의 미래 자체에 대해서 결코 낙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포스트 아포칼립스-이 단편집에서는 메가워 이후라는 단어를 추천하고 있지만-라는 서브 장르가 현대 SF에서 얼마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 50년대 이후 그야말로 쏟아져나온 포스트 아포칼립스물들 중 수작들만 선별한 이 작품집의 재미와 감동은 각별하다.
[#M_ more.. | less.. |01. 세상을 파는 가게(The Store of the Worlds) - 로버트 셰클리 ★★★ 예전에 읽은 작품이지만, 다시 읽어도 좋았다. 멸망 이전의 세계에 대한 노스텔지어 속에는 어쩔 수 없이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02. 거대한 섬광(The Big Flash) - 노먼 스핀래드 ★★ 사이키델릭록의 묘사는 좋았고,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편집증적 악몽과의 결합도 절묘했지만, 그래도 록밴드에서 세계 멸망으로 이어지는 건 너무 비약적이지 않나? -.-
03. 현대판 롯(Lot) - 워드 무어 ★★★★ 멋졌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에 이입되어서, 조마조마하면서 읽어나갔는데, 그래서, 답답한 마누라와 멍청한 애새끼들 때문에 결국 실패하는 결말로 끝날 거라 미리 짐작하고, 그러게, 처음부터 그런 여자를 고르는 게 아니었지, 그게 다 업보야, 끊임없이 되뇌면서 읽어나가다가 결말에서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무릎 쳤다. 오오, 원제가 그런 뜻으로 쓰인 거였고만. 아아, 통쾌해라. :D 물론, 냉정하고,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생각해보자면, 비극적인 결말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은-혹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아남는 주인공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핵전쟁을 불러오는 남성성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거라고 볼 수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그러기엔 작가가 아내와 자식들을 너무나 생생하고 짜증나게 잘 그려내서.. ;-)
04. 바퀴(The Wheel) - 존 윈덤 ★★★ 정갈한 소품. 핵전쟁 이후, 기술에 대한 거의 중세적 죄악시는 너무 진부하지만, 그래도 플롯 자체가 너무 호소력 있다. ㅠ.ㅠ)b
05. 터미널 해변(The Terminal Beach) - J. G. 밸러드 ★★★ 발라드 특유의, 이미지의 향연.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스틸 사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실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이해하는 것보다는 느끼는 게 효과적일 작품.
06. 내일의 아이들(Tomorrow's Children) - 폴 앤더슨 ★ 개인적으로 폴 앤더슨을 싫어하는 이유들이 집약되어서 나타난 작품. 거시적인 문제를 미시적으로 풀어낸 건 좋지만, 등장 인물들은 결국 히스테리컬한 종이 인형들에 불과하다. -_-
07. 누가 상속자인가(Heirs Apparent) - 로버트 애버나시 ★★★ 농경 대 유목으로의 회귀는 꽤 설득력 있는 전망인데, 너무 미국적 관점에서 본 냉전의 반영이라 좀 심기가 불편했다. 뭐, 당시-인민의 태양 스탈린 동무께서 영도하셨던 소련이 실제로 그렇긴 했겠지만. ~_~ (그래도 그 맞은편에, 그래서 멋져보이게 미국 영웅을 세워놓은 건 아무래도 좀 그렇단 말이지. _-_ )
08. 바빌론의 물가에서(By the Waters of Babylon) - 스티븐 베네 ★★★ 그 당시부터 장르 바깥에서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게 너무 부럽다. ㅠ.ㅠ
09. 부드러운 비가 올 거야(There Will Come Soft Rains) - 레이 브래드버리 ★★★★ 사실, 화성연대기 의 그 길고 아련한 스토리 속에서 봤을 때만큼 그렇게 감명 깊진 않았지만, 별도로 떼어놓고 봐도 결코 처지지 않는구나.
10. 시카고 어비스 역으로(To the Chicago Abyss) - 레이 브래드버리 ★★★ 전형적인 레이 브래드버리 단편. 너무나 브래드버리적인.
11. 루시퍼(Lucifer) - 로저 젤라즈니 ★★ 사실 젤라즈니 단편들 중에선 좀 단조롭고 처지는 편이지 않나? -.-
12. 동쪽으로 출발!(Eastward Ho!) - 윌리엄 텐 ★★ 인디언과 흑인들에 대한 죄의식과 그에서 비롯된 도착적 피해 의식이 종말 이후라는 배경을 빌미로 노골적으로 발현된 작품. 뭐, 보기에 따라선 단순한 전복적 상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불쾌할 따름이었다.
13. 성聖 재니스의 향연(The Feast of Saint Janis) - 마이클 스완윅 ★★★
14. "그대를 어찌 잊으리, 오 지구여..."("If I Forget Thee, Oh Earth...") - 아서 클라크 ★★★★ 역시나 아서 클라크. ;ㅁ;
15. 소년과 개(A Boy and His Dog) - 할란 엘리슨 ★★★★ 명불허전. ㅠ.ㅠ)b 결말에서 주인공의 선택은 현대판롯 과도 겹쳐지는데, 그보다는 아기자기한 그야말로 SF적 소품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ㅁ;
일종의 인생 실패 상태의 SF 작가 킬고어 트라우트와 지방 도시의 갑부급으로 성장한 자동차 중개인이지만 점점 미쳐가버리는 드웨인 후버의 만남이 중심 줄거리.
드웨인 주변의 사람들과 상황들, 킬고어가 드웨인과 만나기 위해 떠난 여정 속에서 펼쳐지는 미국의 여러 사람들과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보네거트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어리석고 보잘것없고 하잘것없고 넌센스와 광기로 넘쳐나는 지, 마치 지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설명해주듯 직접 그린 삽화들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킬고어 트라우트라는 (가상의-그러나 시어도어 스터전을 모델로 했다는 점에서 또한 유명한 이름이다) SF 작가의 (가상의) 소설들 요약 소개를 통해 굉장히 다채로운 풍자 SF의 상상력을 펼쳐보이며 현실과 SF의 상상력 사이의 연결 고리도 잠시 내비쳐보여주기도 할 뿐더러, 우리의 삶 자체를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재미. 중심 모티브라 할, 드웨인의 광기의 핵심인, 인간을 일종의 프로그램된 로봇으로 보는 기계론적 관점 역시 아무런 반성과 의식 없이 살아가며 그럼으로써 서로에게 상처 주고 고통 받는 우리의 자화상을 비춰주는 하나의 일그러진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2차대전의 외삽일까? 수많은 세월 동안 전란을 치른 유럽에 아메리카의 최신식 전함이 나타난다. 태어난 이후로 줄곧 전쟁 속에서 살아온 주인공은 장렬한 희생을 통해 미국의 유럽을 향한 손길을 저지한다. 전란 속에 지친 유럽 병사들의 무기와 전술은 2차 대전에서 달라진 것이 전혀 없고, SF적인 부분이라면 유일하게, 후반부에 나타난 미국의 최신 군함의 묘사 정도.
마술적 리얼리즘 혹은 슬립스트림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을, SF로 감상하기엔 흥이 안 나는, 그렇지만 잔잔하게 감동적인 소설.
고대 마야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 엘리자베스는 폐허 속의 유령들을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다. 어느날 어머니의 작업 현장을 찾아온 엘리자베스의 딸. 모녀 사이에 미묘한 갈등은 그렇지만 점점 더 힘을 얻는 마야의 귀족 유령의 출현을 통해 파국과 화합의 갈림길 위에 놓인다.
본인이 남자라서 그런지 그닥 공감되는 않았지만, 반면 여성들의 눈으로 세상을 한 순간 엿본 듯한 느낌은 들었다. 현실 속에 스며든 고대의 마술과 광기의 그림자, 팻 머피의 담담한 어조가 인상적이다. 별 넷은 그런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