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으로 돌아왔다. 별 건 없지만. 고전이라기엔 초기 전형인 스페이스오페라. 그래도 나는 전설이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작품은 몇 되지 않는데, 이 작품은 능히 그럴 수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남북 전쟁 직후 금광 캐러 서부로 떠난 남부 신사 존 카터는 유체 이탈로 뜬금없이 화성에 간다. 가서 혼자 킹왕짱 다 해먹고 거의 다 홀라당 벗은 쭉쭉빵빵 미스 화성도 하나 득템한다. 거부감 들 정도로 백인 판타지가 순진무구하게 펼쳐지는 작품. 그렇지만 눈 밝은 독자라면 이 작품이 열어젖힌 상상력의 문을 뒤늦게 밟고 나온 수많은 걸작들의 흔적을 숱하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마빈이 쓴 은하수를여행하는히치하이커를위한안내서 도솔판 세계SF걸작선 의 용과싸운컴퓨터이야기 를 기억하시는지. 솔라리스 때문에 심각하고 심오하고 난해한 작가로만 오해하기 쉬운 렘의 또 다른 면-사이버 시대의 농담 미학이라고 할 법한 유머 감각이 빛나는 연작 소설집. 다만 앞의 유쾌한 빛이 뒤로 갈수록 사색의 어둠 속에 퇴색하는 것은 조금 안타깝다.
사이버네틱스의 노래 * 트루를의 기계 * 흠씬 때려주기 * 세계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이상의 세 편이 이 작품집에서 가장 유쾌하고 발랄하다. 강추.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의 일곱 가지 여행 이야기 * 첫 번째 외출 혹은 가르강티우스의 덫 * 첫 번째 외출(A) 혹은 트루를의 전자 시인 * 두 번째 외출 혹은 크룰 왕의 제안 * 세 번째 외출 혹은 확률 드래곤 * 네 번째 외출 혹은 트루를이 판타군 왕자를 사랑의 독이빨에서 구하기 위해 팜므파탈라트론을 만들고 나중에는 아기 폭격을 했던 이야기 * 다섯 번째 외출 혹은 발레리온 왕의 해로운 장난 * 다섯 번째 외출(A) 혹은 트루를의 처방 * 여섯 번째 외출 혹은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가 해적 퍼그를 이기기 위해 제2종 악마를 창조한 이야기 * 일곱 번째 외출 혹은 트루를의 완벽함이 소용없었던 이야기 * 지니어스 왕의 이야기 기계 세 대 이야기 * 알트뤼진느 혹은 신비학 수행자 본호미우스가 보편적인 행복을 가져오고자 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진실한 설명
첫 번째와 두 번째 외출 세 편이 앞의 유쾌함을 이어받고 있지만 다섯 번째 외출 이후로는 김이 빠지고, 특히 뒤의 두 편은 솔라리스 의 렘에 더 가깝다. 나름 읽을만 하지만 아무래도 아쉽다.
키프로에로티콘 혹은 마음의 일탈, 초고착과 탈선 이야기에서 * 페릭스 왕자와 크리스탈 공주
인간과 외계 생물이 나누는 철의 대화 1권 중반까지는 그저 SF의 상투적인 세계관만 빌려온 공군 밀리터리물이지만, 중반 무렵, 주인공이 침입자 JAM-외계 생물과 지구 방위 전투기 유키카제-기계 사이에 끼어있는 자신-인간을 발견하는 순간 소설은 밀리터리의 대지를 박차고 SF의 하늘로 날아오른다. 인간과 기계, 기계와 외계 생명, 외계 생명과 인간 사이에 음모와 신뢰가 얽히면서 외계 생명은 인간을 닮아가고 인간은 기계처럼 황폐해지며 기계는 인간의 손을 떠나 외계의 그 무언가가 된다. 밀리터리 특유의 기계적 하드함이 SF 특유의 사변적 하드함으로 승화되는 묘미를 맛볼 수 있는 연작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