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2020. 11. 8. 12:03 posted by zelaznied

N.K.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황금가지, 2020.07.

★★★★

SF와 판타지의 영역은 끊임없이 갱신 확장된다고 이야기하는 단편집
부서진대지 3부작 중 국내에 출간된 2권을 이미 읽었다면 제미신의 창작 경향은 대충 파악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이 단편집은 그러한 경향, 방향성에서 얼마나 다채로운 이야기가 가능한지 보여주는 풍요로운 성찬이 될 것이다. 지질학에 기반한 탄탄한 SF에서 결국 판타지로 나아가던 부서진대지 1,2부에서처럼 SF보다는 판타지적 경향들이 더 짙지만, 양자의 구별이 무색해진 작금의 추세 속에서는 큰 흠은 되지 않는다. 류츠신-켄 리우-이윤하 등의 동아시아 SF와 함께 버틀러-제미신의 아프리칸 SF 또한 얼마나 SF/판타지의 경계를 확장하고 다양성을 공급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수록작들: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 ★★★☆
오멜라스에 대해 어둡게 빛나는 거울상.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개인의 양심을 이야기하는 오멜라스를떠나는사람들 이 다소 갑갑하게 느껴졌다면 제미신의 단편에서는 좀더 숨이 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오히려 더...

위대한 도시의 탄생 ★★
예술과 근대, 도시에 대한 어반 판타지. 자체적인 완결성이 부족해 보여 아쉽다.

붉은 흙의 마녀 ★★★★★
최상급의 단편 환상소설. 주제나 구성이나 문장이나 모자란 구석이 하나도 없다. 이 한 편만으로도 단편집 전체를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연금술사 ★★★★
마찬가지로 뛰어난 환상소설. 요리와 주술과 마법 사이에 누구나 납득할 공통점에 기반한 상상력과 서술이 백미이고, 마지막 장면은 르귄의 파리의4월 이 떠오르기도 한다.

폐수엔진 ★★★★
매력적인 대안적 스팀 펑크. 단편이지만 중편 SF에 필적하는 재미와 밀도를 보여준다.

용구름이 뜬 하늘 ★★★
르귄 느낌의 단편. 대개는 키리냐가 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트로이 소녀 ★★★☆
웹 2.0... 혹은 모바일 웹 시대의 포스트 사이버펑크. 어플리케이션 소녀는 무슨 꿈을 꿀까?

졸업생 대표 ★★★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의 디스토피아물. 

이야기꾼 대리인 ★★☆
풍자적이고 오싹한 메르헨 호러 판타지.

천국의 신부들 ★★★☆
에일리언 혹은 블러드차일드 , 첫번째접촉 이야기에서 재생산을 다룬 것이 드물지는 않겠지만 이슬람 전승을 통해서 새롭게 다듬어 낸 점은 꽤 흥미롭다.

평가자들 ★★☆
다소 늘어지고 산만한, 옥타비아 버틀러도 연상되는, 호러 SF 단편.

깨어서 걷기 ★★★
다시 블러드차일드 와, 하인라인의 퍼펫마스터 . (더하기 불사주식회사 ?) 결론은 약간 비약처럼 느껴졌지만, 나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댄서 ★★★
이슬람이라고 하기도 지치고 기독교든 유교든 그저 원리주의 가부장적 어떤 종교든지 빠져들 수 있는 디스토피아물.. 여러 모로 많은 층위로 읽힐 수 있는, 그러나 별로 두껍지 않은 엽편. 두껍지 않은데 여러 층위로 읽을 수 있게 하는 현실이 너무 혐오스럽다.

퀴진 드 메므아 ★★★★★
추억은 결코 시각적이지 않다. 가장 직접적인 것은 후각이고, 미각도 또한 거의 마찬가지로 그럴 것이다. (그래, 프루스트.) 결코 추억이라 부를 수 없는, '가슴이 꽉 메어' 오게 하고,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게 하고,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럽도록 하는 그런 기억들, 지나간 시절의 아물지 않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상처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한 우아하면서도 절절한 답변.

스톤헝거 ★★
부서진대지 시리즈를 읽지 않았다면 어리둥절해질, 비자립적인 단편.

렉스강가에서 ★★★
유니콘변주곡 이 살짝 떠올랐는데, 매력적인, 나른한 판타지.

수면 마법사 ★★★★
이집트 제국 마법 판타지. 제미신은 손 대는 것마다 서브 장르를 만들어내는 걸까? 아니면 제미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신조어들이, 새로운 표딱지들이 필요한 걸까? 다소 예술주의적이지만 흥미로운 단편.

헤노시스 ★★
예술과 불멸에 대한 산만한 엽편. 

너무 많은 어제들, 충분치 못한 내일들 ★★★
반복되는 시간이란 흔한 소재인데 인터넷 네트워크와 인간 관계에 대한 고찰로 연결시킨 점은 좋았다.

유트레인

비제로 확률 ★★★
머피의 법칙을 가장 잘 소설화한 단편이랄까. 일회성의 예측불가능한 삶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 솔직한 신나는 단편 환상소설.

잔잔한 물 아래 도시의 죄인들, 성자들, 용들 그리고 혼령들 ★★★★
담담한 만큼 더 절절한 단편 환상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