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 웨이크

2019. 10. 4. 16:59 posted by zelaznied

무르 래퍼티 지음
신해경 옮김
아작, 2019.04.

★★★

클로닝, 영생, 그리고 미스테리

2009년 테드 창이 부천에서 처음 캔사스의유령 의 도입부를 소개했을 때 느꼈던 전율과 호기심과, 막상 2015년에 불새에서 번역 출간해서 전편을 읽었을 때의 감상이 떠오른다. '클로닝과 기억 전이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미래에, 다른 항성으로 가던 배에서 승무원 여섯 명의 새로운 클론이, 기억이 모두 지워진 채 깨어나고, 그들은 곧 수십 년의 나이를 먹은 자신들의 시체를 발견한다'는 도입부가 매혹적이지만, 실제 결말까지의 여정은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점에서.
클로닝과 기억 백업, 전이를 통해, 죽어도 죽기 전 백업된 기억을 지닌 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인은 일종의 사회적 망신 주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여러 생애 동안 다양한 직업을 마스터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에서도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이의 갈등은 여전하며,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선 속에서도 미스테리는 발생한다.
미스테리 자체보다는 (SF들에서 많이 다뤄져서 진부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클로닝과 기억 백업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들을, 낯선 환경에 던져진 등장인물들이 차례차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들을 구경하는 SF적인 재미가 쏠쏠하다.

재미 : 4
감동 : 2
SF   : 3


그림자로부터의 탈출

2019. 10. 4. 16:37 posted by zelaznied

야누쉬 자이델 지음
정보라 옮김
아작, 2019.04.


★★★


동구권의 이색적인 디스토피아물


어느날 침공해 온 외계인들을 물리쳐준 착한 외계인들에게 통제 받는 지구는 바로 소련과 폴란드 사이의 현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동구권 SF답게 디스토피아에서의 삶에 대한 세부 묘사는 투박하면서도 정교하고, 현실적인 생활감이 잘 묻어난다. 마치 잘 돌아가는 낡은 기계에 찌든 윤활유 같다.


자먀찐의 우리들 도 그렇고, 동구권의 디스토피아물들은 확실히, 역사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 SF의 상상만으로 지어진 디스토피아들과는 다른 맛을 준다. 디스토피아물은 대개 사회 제도에 더 초점을 맞추고 과학기술은 단지 감시와 통제를 위한 도구로서 등장하는데, 외계인들에게 지배받는 이 작품 속의 과학기술은 외계인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실험들로 나타나 있어서 SF 본연의 재미까지 잘 가미되어 있다.


재미 : 3

감동 : 3.5

SF   : 3

헬로 아메리카

2019. 9. 17. 17:43 posted by zelaznied

제임스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현대문학 2019.03.

★★★★

아메리칸 드림의 사막 위로 불어오는 뉴웨이브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단편선집을 통해서, 지구 종말 삼부작을 넘어 비로소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 세계 전반을 개관할 수 있었는데, 미래에 사막화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장편소설은, 그러한 개관을 바탕으로 해야 좀더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듯하다. 밸러드의 묵시록적 미래관을 떠받치는 두 개의 중심축은 각각 히로시마 이후 계속된 핵무기 실험과 나사의 유인 우주 탐사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한데, 전자야 SF들의 장미빛 미래 전망을 부순 결정적 사건으로 많이 이야기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밸러드가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듯한데, 화성 탐사 이후 화성인이 대운하를 건설한 행성로맨스가 불가능해진 것처럼, 우주 탐사와 개발이 현실화되면서 우주 전체가 이전 SF들에서처럼 꿈과 환상과 낭만의 무대가 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SF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초래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두 사건의 함의에 아랑곳하지 않고(혹은 애써 외면하고) 전통적인 SF를 쓴/쓰고 있는 작가들도 많지만, 밸러드의 어딘가 정신이 나가버린 강박적인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내면이 외화된 듯한 황량한 풍경들은 그러한 함의를 솔직하게 직시한 결과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구 종말 삼부작은 SF 종말 3부작으로 치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석화된 상상, 리얼리티에 익사한 SF, 불타버린 꿈...) 그리고 미국의 우주 탐사와 아메리칸 드림 사이의 긴밀하고 복잡한 관계를 생각해보면, 기후 변화로 서해안을 제외한 대륙 전체가 사막화된 미국을, 몽상과 환상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유럽의 2차 탐사대가 가로지른다는 이 작품은 어쩌면 J.G. 밸러드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상륙 이후, 지나가버린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에 사로잡힌 탐사대가 점차 와해되고, 주요 인물들이 조난과 난파에 가깝게 사막의 갈증 속에 피폐하게 드러누울 때까지의 전반부는 곧바로 지구 종말 삼부작을 떠올리게 하는, 지극히 밸러드적인 진행을 보이는데,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이후 벌어지는 새로운 사건들은, 우선 밸러드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전통적인 SF 소재들ㅡ자동인형, 태양광비행기 등등ㅡ이 풍성하게 쏟아진다는 점이 우선 이채롭고, 아메리칸 드림 이면에 억압되어 있던 광기ㅡ편집증과 고립주의, 파괴욕과 지배욕ㅡ를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도 흥미롭다. 전반부는 바깥에서 바라본 아메리칸 드림이라면 후반부는 안에서 들여다본 아메리칸 드림이랄까. 대부분의 작품들과 달리 다소 낭만적으로 처리된 결말은 미국을 좋아해서 썼다는 밸러드의 언급이 진심이었나 싶어 쓴웃음을 짓게 하는데, 전반적으로 밸러드 작품 세계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포만감 가득하게 읽을 수 있는 장편이라고 생각된다.


재미 : 4
감동 : 3
SF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