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닮았는가

2020. 11. 8. 08:07 posted by zelaznied

김보영 지음 

아작, 2020.10. 

★★★★★ 

지난 10년간 한국SF에서 가장 멀리 나간 이야기들
물론 또, 듀나도 있지만, 각각 방향이 다르니 서로 얼마나 더 멀리 나갔는지 비교할 수는 없다. 듀나가 보다 보편적인 SF로서 멀리 나갔다면 김보영은 보다 개별적인 방향으로, 한국 SF의 가능성을 확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2009년부터 2020년까지 쓴 단편들을 묶은 이 단편집은, 그러니 지난 10년간 한국 SF가 몇 개의 축에서 그 영역을 확장해나간 기록이자 그 결과물로서의 하나의 지도라고 할 수 있겠다.

수록작:

엄마는 초능력이 있어
김보영 SF의 기본 얼개를 잘 보여주는 엽편. 탄탄한 과학적 설정이 SF의 상상력 속에서 어떻게 시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 일견 차가워보이는 과학적 진술들이 어떻게 삶의 감정들을 건드릴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0과 1 사이
지난 10년간 발표된 한국 SF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10년의 세월을 통해 시의성을 넘어 고전으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냈다.

빨간 두건 아가씨

고요한 시대

니엔이 오는 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한국형 초인물이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 정답. '한국형', '한국적인' 등의 라벨에 대한 갑론을박은 영원하겠지만, 이 작품이 품은 페이소스와, 이 작품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2014년 4월을 전후로 한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나 그럼에도 역시나 이후로 지나왔으며 앞으로 지나갈 세월의 무게를 온전히 견뎌낼 힘 또한 가지고 있다.

로그스 갤러리, 종로

걷다, 서다, 돌아가다
엄마는초능력이있어 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겠다. 별들의 반짝임을 눈물의 반짝임으로 되비쳐주는 엽편.

얼마나 닮았는가
현시점에서 김보영 SF가 가장 멀리까지 나가 이룬 성취. 이 작품은 전설이 아니라 신화가 될 것이다.

같은 무게


2019. 10. 5. 09:03 posted by zelaznied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엘리, 2019.05.


★★★☆


테드 창의 두 번째 중단편집


2002년에 출간된 당신인생의이야기 이후 17년 만에 출간된 두 번째 중단편집이다. 첫 중단편집의 충격은 기대하기 힘들지만(충격은 대개 처음에만 오는 법이고, 소프트웨어객체의생애주기 외에도 이런 저런 공식/비공식적인 경로로 국내에 이미 소개된 작품들이 상당수 포함된 탓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견실한 SF들이 수록되어 있다.


1.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

플롯이 매우 정교하고 마지막의 파토스가 효과적이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으로는 진부한 결정론적 시간여행물의 재탕이라는 점이 아쉬운 작품이다. 약간 비약이지만 테드 창의 근작들은 자칫하면 진부한 도덕극으로 굴러떨어질 아슬아슬함이 엿보인다.


2. 숨 ★★★★★

일단 세계-우주 자체가 너무 압도적이고, 그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압도적이며, 그 현상에 따라 주인공이 일으키는 사건이 너무 압도적이고, 사건의 결과 다다르는 결말의 결론이 너무 압도적인 문장으로 써져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다만 압도될 수밖에. 메시지는 단순한 도덕 설교의 재탕에서 벗어나 실존적이고, SF만의 방식으로만 도출되었기에 완벽하고 아름답다. 되돌아 보면 앞의 단편선에서는 일흔두글자 정도만이 떠오른다.


3. 우리가 해야 할 일 ★★★

주제와 형식과 표현과 결말의 합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짧은 만큼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


4.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5.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

모든 것이 기괴했던 서구 근대의 기괴했던 육아에 대한 글. 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글. 의도와 결과 사이의 아이러니ㅡ실험 관찰이 세계에 대해서 보다 그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줄 뿐이라는ㅡ에 관한 글.


6.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

언어와 의식과 기억과 문화에 대한 아름다운 작품. 네인생의이야기 로 대표되는, 세계에 대한 사변을 개인의 드라마로 끌어오는 테드 창 특유의 작법이 잘 살아 있다. 객관적 진실과 주관적 기억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비극을 근미래 아버지와 딸 사이의 갈등 속에서는 객관적 진실의 편을 들고, 중간 중간 삽입된,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로 전이된 아프리카 소년의 체험에서는 오히려 주관적 기억의 편을 들어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숙고해보도록 이끈다. 새로운 테크놀러지가 개인과 공동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탐구로서 SF에 대한 작가의 지론이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7. 거대한 침묵 ★★☆

테드 창의 작품들 중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으로 파토스에 경도된 엽편. 그렇지만 고독과 단절의 심연을 건너려는 절절한 독백은 마음을 울린다.


8. 옴팔로스 ★★★★

표면적으로는 0으로나누면 과 비슷한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의 신념과 지식에서 벗어난 현상을 발견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믿었던 질서와 원리가 모두 무너지고 의도 없고 목적 없는 냉혹한 우주에 던져진 인간은 무엇을 통해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다시 자유의지의 문제로 발전한다. 테드 창의 제2기라고 해야할 이번 20년 동안 집요하게 천착한 주제다. 주제에 맞게 완전히 새로운 원리로 돌아가는 우주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다시 개인의 극적인 체험과 관점의 변화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표제작 숨 과 더불어 이 중단편선에서 테드 창에 대한 기존의 기대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다.


9.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플롯은 정교하고 치밀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파토스에 기댄 드라마일 뿐이라는 점이 아쉽다. 평행우주라는 설정을 빌려 테드 창은 의도와 결과 사이의 차이와 이를 통해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을 또다시 던지는데, 평행우주 혹은 다중우주 속 또다른 나가 맞게 되는 결말을 알게되는 사회에서의 사회적 변화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초점은 개개인이 맞닥뜨리는 작은 일화들에 집중되어 있다. 

별의 계승자5: 미네르바의 임무

2019. 10. 5. 08:51 posted by zelaznied

제임스 호건 지음
최세진 옮김
아작, 2019.05.

★★★☆


길고 두꺼운 시리즈의 멋진 종착역


외계인의 기원을 밝히고, 살아있는 외계인들을 데려오고, 외계인들의 세계에서 사이버 우주를 발견하고, 매 시리즈마다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던(혹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던) 헌트 박사가 이제 스스로에게 다중우주까지 가져온다.(혹은 다중우주까지 나아간다)

77년에 나온 1권은 인류의 전투적인 도전 정신을 예찬하고 별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하더니 이듬해에 바싹 붙어서 나온 2권에서는 돌연, 그런 도전 정신이 창출된 경쟁 위주의 세계관을 친절한 거인들의 사회와 대비해서 회의한다. 지나치게 모험과 흥미 위주로 경도된 3권과 4권에서는 그런 진지한 테마는 잠시 뒤로 물러나더니 한참의 시간을 두고 나온, 타계하기 5년 전에 낸 마지막 장편에서는 3권 결말에서의 실마리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대테마로 돌아 오면서 한 점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멋지게 끝맺는다.

생각해보면 3권이 제일 흥미 위주의 이야기로 시리즈의 격을 좀 떨어뜨렸고, 4권도 내부 우주에 대한 흥미로운 사변이 서구인의 제3세계에서의 모험담식의 플롯으로 잘 살아나지 못한 면이 많이 아쉬웠는데 5권은 다중우주에 대한 상당히 하드한 접근과, SF의 가장 굵은 줄기 중 하나인 사회학적 사변이 적절하게 곁들여져서 단권 SF로서도 완성도가 높게 느껴진다.


재미 : 4

감동 : 3

SF   : 4